아카이브

2013-03-19

故 최덕휴 교수 (故 최덕휴 화백 유작 100여점 기증)

 

 

자연의 진정한 실체를 탐미한 최덕휴의 예술

최덕휴 교수 특별기획 소요유전 개최에 부쳐

 

2012926일부터 1019일까지 고 최덕휴 교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2012 특별 기획 逍遙遊(소요유 전)이 우리학교 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66년부터 1987년까지 우리학교에 재직했던 최 교수가 학교에 기증한 작품 100여점 중 수채화를 중심으로 기획됐다. 고인의 제자였던 우리학교 최병식 교수에게서 최덕휴 교수의 일대기와 작품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작품은 처음 사고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고 되어져가는 대로 움직여가는 의사에 따른다라고 한 피카소의 말을 인용했던 최덕휴의 예술세계는 항상 자연이나 도시의 한 복판에 서서 화폭을 펼쳤고, 장황한 이론보다는 끊임없이 작업현장에서 다작을 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전개했다.

 

그의 미술가로서 출발점은 휘문중학교 2학년 시절 미술교사로 장 발(張勃)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일본 유학시절 최덕휴는 1941-1943년 지금의 무사시노미술대학(武藏野美術大學)인 제국미술학교(帝?美術?校開校)에서 유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작품으로는 1941년 그의 나이 20세에 그린무사시노 농가가 있다. 간결한 대상의 생략과 3차색으로 농익은 색상의 혼합, 유채의 질감을 유희하는 마티에르 감각은 청년시절이었지만 그가 평생 동안 구사한 작품세계와 많은 점에서 상통된다.

 

귀국 후 작품은 크레용으로 그린 1947비원에서 색채에 대한 해석을 매우 감성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형태는 생략되고, 핵심적인 대상의 특징만을 재구성하는 스타일을 구사했다.

 

1950년대는 작업활동으로는 초기에 해당하지만 앵포르멜 등 명멸하는 외국사조의 유입이 이루어지던 시대적 상황에서 다양한 변화를 추구한다. 1950년대 말 미국 신시네티의 국제석판화전에 입선한 것도 그렇지만 세잔을 연상하게 하는 판화작업 등은 그의 실험기 작품들이다.

 

  

 

그 중 1958돌산은 폴 세잔느의 생 빅토와르 산(La Montagne Sainte-Victoire)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대상의 재해석과 숲과 산 등 자연의 원형을 탐구하려는 고민이 스며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강한 입체덩어리로 해석한 산의 모습과 과감히 생략된 나무와 숲의 형상들을 등장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예고했다.

 

청년시절 그의 도발적인 착상과 작업태도는 학창시절부터 심취한 빈센트 반 고흐, 피에트 몬드리안의 영향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 작업노트에서 말하고 있지만 몬드리안에게는 추상화보다 추상화를 추구하는 방법에 대하여 경의를 표했다고 말할 정도로 형태의 본질, 조형언어의 원형에 대한 추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제작된 1969년의 불암산의 만추는 겹겹이 쌓여진 유채의 마티에르와 유려한 색채를 구사하는 등 당시 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어서 70년대의연봉」「천축사의 가을등 역시 그 스스로 신자연주의라고 일컫는 대상의 본질을 천착하려는 최덕휴의 자연관을 만나게 되는 작품들이다.

 

이후 80년대까지 남산, 현리, 불암산, 북한산, 도봉산을 비롯하여 그가 재직한 우리학교 캠퍼스 곳곳을 가장 즐겨 찾았으며, 이외에도 InSEA(International Society for Education through Art) 외국회의 등 해외여행을 통하여 프랑스, 미국 등의 풍경 역시 적지 않은 작품수를 남기고 있다.

 

 
자연의 진정한 실체를 추구했는데, 이를 위해 색채도 시각으로 비쳐진 것과는 달리 하였고, 형체도 과감하게 생략하여 단순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최덕휴의 작업관을 말해주는 가장 간결한 작가노트이다. 그의 작업은 청년시절부터 대체로 일관된 세계관을 추구했고, 평생 단순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편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그가 일본군, 중국군, 광복군, 한국군 등 4개국의 군인생활을 해오면서 체득된 과감성과 절도, 원칙주의적인 사고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마치 화폭에서 조각을 하듯이 유채의 질감을 십분 활용하면서 진전시켜 나갔으며, ‘물감을 칠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올려가는작업을 즐겨했다. 즉 그의 작업은 그려나가는 일과 함께 해체와 분석, 구축과 생략 등의 작업을 무수히 반복했다.

 

최덕휴 교수의 작업습관은 매우 특별했다. 불같은 성격으로 소품의 경우 하루에도 몇 점씩 다작을 하는 스타일이며, “나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자주 되뇌이면서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철저한 현장의 사생을 통해 대부분의 작업이 진행됐고실내 작업을 통한 보완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형식을 취했다.

 

그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것은 수채화이다. 산봉」「설악산(가을)등 경희대학교 소장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성품과 흡사한 명쾌한 필선과 속도와 역동성을 더하는 터치, 대상의 특징만을 빠르게 속사함으로서 유화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평소 라울 뒤피의 작품을 자주 언급하였던 것으로 보아 영향을 받았거나 동질감을 느낀 것으로 판단된다.

 

전반적인 주제에 있어서는 그리 엄격한 편은 아니다. 즐겨 찾았던 산과 숲 이외에도 극동빌딩 중심」「서울 도큐호텔 중심등 서울풍경, 경희대, 연세대 등 대학 캠퍼스, 봄의 대한의학원」「대한의학원등의 병원, 창신동 시장」「성공회 성당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뤘으며, 사계절을 전방위적으로 작업하는 습관에 따라 선호하는 계절 또한 없는 편이다.

 

 

최덕휴는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선 1956-1957년 이미 초, 중고 미술실기대회의 개념을 도입했고, 1957-1958년 덕수궁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과 동덕여고 등에서 미술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했으며, 1966년부터 1987년 퇴직할 때까지 21년간 우리학교 미술대학의 전신인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서 봉직하면서 초기 기틀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경력에서 눈에 띠는 것은 군생활이다. 1944년 학도병으로 징병됐고, 일본군을 탈출한 후 다시 중국군, 광복군, 국군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광복군 시절에는 제1지대 제3구대 제1지역책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이후 6.25가 발발하자 다시 군에 입대해 1956년 소령으로 제대하게 되는데 군 복무 중에도 틈나는 대로 작업에 몰두하는 특별한 이력을 지닌 작가이자 애국자이다.

 

유족들에 의하여 최덕휴 교수 사후 2003년에 생전에 봉직했던 우리학교에 100여점을 기증하여 매년 그를 기리는 전시가 개최되고 있다. 이번 경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소요유전은 특히 그의 작품 중 주옥같은 수채화들이 다수 출품됨으로써 최근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는 수채화의 진수를 소요할 수 있는 기획전이 될 것이다.

 

 

[출처 : 경희미디어센터 / 최병식 기자 / 2012.09.25.]